초심자법문 처음 불교를 찾은 분에게 불교에 처음 발을 내디딘 사람들이 불교를 어떻게 닦고 믿어야 하는지 방황하는 경우를 참 많이 봅니다. 어떤 스님은 참선이 최고라 하여 무조건 앉아보라고 하고, 또 어떤 스님은 기도만 하라고 합니다. 또 어떤 스님은 경을 많이 읽으라 하고, 또 어떤 스님은 주력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뿐만 아니라 팔만대장경이란 방대한 경전을 봐도 어떤 경에는 이것이 최고다고 했다가 또 다른 경을 보면 저것이 최상승이라고 하니 우매한 중생의 식견으로 헤아리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말씀인 경과 만중생이 화합하여 사는 도리의 가르침인 율과, 깨달음을 얻으신 역대 선지식들께서 방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해석한 논으로 구성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 미혹한 중생을 골탕먹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단지 우리 중생의 사는 모양과 처한 환경이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그 수많은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설해진 것이기에 다르게 보일 뿐입니다. 똑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진리는 하나이지만 그 하나의 진리로 돌아가려는 중생의 근기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그 근기에 맞는 가르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눈 밝은 선지식, 자비로운 스승이 필요한 것입니다. 참선에도, 염불에도, 지계에도, 참회기도에도 스승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길을 밝히는 등불과 같은 존재가 스승이기에 올바른 스승을 만나면 부처님의 세계에 쉽게 다가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려운 사람의 몸을 받아 부처님의 법을 만났다 하더라도 또 하염없이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틈나는 대로 법회에 참석해 스님들의 법문도 듣고 의심나는 것에 질문도 하면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승이 없이 혼자 닦는 사람들을 보면 측은한 점이 많습니다.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사람이 신비함에 빠져서 초인적인 능력을 얻고자 욕심을 낸다거나, 단기간에 뭔가 이룰 욕심에 집착해 무리한 정진을 하기도 하고 염불하는 사람이 현세의 복락이나 구하면서 자기만을 생각하며 대승의 자비심을 버린다거나 절에 와서 염불할 때와 달리 집에 돌아가 행하는 모습이 아귀나 아수라와 같다면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십만팔천 리로 멀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스승 아래서 어떤 수행을 하든지 우리 불자들이 반드시 새겨두어야 할 점은 그 어떤 가르침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나서 새로운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약에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벗어나면 그것은 사도요 외도입니다. 부처님은 결코 불법을 어렵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쉽게 가르치셨습니다. 진리는 가장 쉽고, 가까운데 있어 누구나 실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쉬운 길이 수행입니다. 수행은 결코 힘들고 복잡하고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수행은 작은 일상의 노력만으로도 오히려 인생을 행복하고 수월하게 사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작은 노력으로도 큰 소득을 얻을 수 있는 도리가 바로 부처님법입니다. 염불법만 해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쉬운 수행입니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일상 속에서 꾸준히 지어가면 될 일입니다. ‘부처님이 언제 복을 주시려나? 나는 오늘 일천 번 염불했는데 부처님은 왜 아무 소식도 없으시나?’ 하는 그런 욕심은 버리고 아무 생각없이 천지만물이 내가 불러주는 부처님 부르는 소리에 모두 평화롭고 행복해지리라 여기며 염불하면 그대로 나 자신이 행복하고 복이 저절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참다운 불자는 절에 있든, 집에 있든지 간에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큰 힘 들이지 않고 부처님 명호 부르는 그 한마디만으로도 부처님과 함께 살고 부처님의 뜻에 맞게 삽니다. 생활 속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불자여러분! 이렇게 생각 생각에 부처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면 그 사람은 설령 깨닫지 못한다 해도 걸음마다 공덕을 짓고 걸음마다 업장을 녹여 구경에는 극락왕생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상의 생활 가운데 쉬운 길이니 모두 함께 마음속에 부처님 모시고 살아갑시다. 나무아미타불! 혜총스님 / 감로사 주지. 실상문학상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