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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백스님이 죽어 관찰사 되다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3-25 조회수 4443

생활법문

 

낭백스님이 죽어 관찰사 되다

 

낭백수좌(浪白首座) 또는 만행수좌(萬行首座)로 알려진 낭백스님은 어린나이에 범어사에 출가하여 곧은 뜻과 신심을 가지고 수행정진하다가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큰 원력을 남은 일생의 수행으로 삼아 닦아나가길 서원하고 생의 마지막까지 실천하시다가 자신의 육신마저 호랑이에게 보시하며 생을 마감하신 스님입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은 극에 달합니다.

유교는 득세하고 불교와 스님은 억압과 핍박을 받는데 전국의 모든 사찰에 부여된 부역과 노역과 잡무는 형언하기 어려웠습니다. 무려 30~ 40종 부역이 주어졌다고 전합니다. 종이, , 노끈, 짚신, 새끼, 지게 등 그리고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수 곡물 등 온갖 농작물에 이르기까지 범어사에 철마다 부여된 부역의 수만도 36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무렵의 스님들은 자신들의 공부는 전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일생을 나라에서 부과된 부역에 종사하기도 바쁜 나날이었습니다.

 

낭백스님은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뼈아프게 개탄하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부역만은 면하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설사 금생에 안 되면 내생에라도 부역을 면하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하리라 마음먹고 원력을 세웠습니다.

금생에는 복을 많이 지어서 내생에는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리라. 그리고 그 관리의 특권으로 범어사 스님들의 부역을 혁파하리라.” 하고 그 날부터 힘이 닿는 대로 복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의 기찰 부근 그러니까 동래를 들어가고 나가는 길목 큰 소나무 밑에 샘물을 파서 행인들의 식수를 제공하고, 넓은 밭을 개간하여 참외, 오이, 수박 등을 심어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무한정 보시하였으며, 밤에는 짚신을 삼아서 모든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신을 보시하는 등 온갖 일로써 많은 사람을 구제하시다가 마지막 늙은 몸뚱이까지도 보시하고자 돌아가실 때에는 범어사 뒷산 밀림 속에서 삼일동안 헤매다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자신의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스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세 가지의 증명할 일을 남겨 놓기로 하였습니다.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어 올 때에는 모든 관리가 다 일주문 앞 하마(下馬)에서 내리는데 자신은 어산교 앞에서 내리겠으며, 자신이 쓰던 방을 봉해 두었다가 스님 스스로가 열 것이며, 사찰의 어려움을 물어서 해결할 것을 약속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낭백스님이 돌아가시고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순상국(巡相國) 조엄(1719~1777)이라는 중앙의 높은 벼슬을 지내는 사람이 온다는 전갈을 받고 범어사 스님들은 언제나 지방관리가 오면 그러했듯이 주지스님 이하 모든 대중들은 어산교까지 나가서 행렬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상국 조엄은 일주문까지 말을 타고 올라가는 상례를 깨고 어산교 앞에서 말에서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순상국 조엄은 처음 찾아오는 사찰이지만 내가 평소에 많이 보아오던 모습이며 낯설지 않다라고 하면서 주지스님에게 범어사 내력에 대하여 자세히 물었습니다.

주지스님은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범어사는 임진왜란으로 사찰이 모두 전소되고 묘전 계환스님 등 사찰을 다시 중건 중수하고 지금은 각종 부역과 잡무에 시달리고 있으며 낭백스님은 스님들의 부역 면제하리라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으며 자신의 방을 아무도 열어보지 말라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찰을 자세히 돌아본 조엄은 낭백스님의 방 앞에 와서 수 십 년 동안 봉해둔 문을 뜯고 열어보니, “개문자시폐문인(開門者是閉門人) - 문을 여는 사람이 바로 문을 닫은 사람이다.”란 스님의 친필유묵이 몇 십 년의 세월 속에 얼룩져 있었습니다. 순상국 조엄은 조금 놀랐습니다. 자신이 과거생에 낭백스님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조엄은 동래부사에게 스님들에게 주어진 부역을 모두 혁파하라고 명하였고, 이때부터 전국의 모든 스님들에게 부과된 부역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증거로 지금 어산교에서 500m 정도 내려가면 옛날에 사용하던 길옆에 5개의 비석이 있는데, 그 중에서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嚴革?寺弊永世不忘壇)’이라는 비가 서 있습니다.

 

한편 조엄은 1763년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갔을 때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와서 우리나라 최초로 고구마 재배를 실현한 분입니다.

 

조엄은 고구마 종자를 우리나라에 심어 생산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씨 고구마 몇 말을 부산진으로 돌아가는 선편을 통해 보냈습니다. 고구마 종묘를 당시 동래부사에게 전해주고 처음으로 재배에 성공함으로써 후일 고구마가 진정한 구황작물, 흉작일 때 상당한 수확을 얻을 수 있는 작물로 널리 이용되어 후세들은 고구마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처음으로 심은 곳이 바로 부산 영도입니다. 대마도에서 재래방법을 익혔기에 섬에서 재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여기고 자신이 한때 절영도(영도)에서 있었던 것에 착안하여 재배하게 한 것입니다. 열성적으로 고구마 보급에 힘을 쏟았기에 그를 조내기 고구마로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도 청학동 일원에 조내기 마을이란 곳이 있다고 합니다.

 

중생은 업력으로 살고 보살은 원력으로 삽니다.

자신의 원력이 지극하면 불보살이 되어 다시 중생을 구원하려고 환생하여 돌아옵니다. 낭백스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면제시켜 줄려고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보살은 멀리 있는 분이 아닙니다.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낭백스님이 그런 분입니다.

 

나무아미타불

 

혜총스님 / 감로사 주지. 실상문학상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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