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四聖諦)는 고성제(苦聖諦), 고집성제(苦集聖諦), 고멸성제(苦滅聖諦),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의 네 가지 진리를 가리킵니다. 이 성제(聖諦)를 줄여서 고·집·멸·도의 사제라고도 하는데 ‘성스러운 진리, 깨달음의 진실한 도리’라는 뜻으로 모든 세간의 고통을 여의고 깨달음의 이치를 밝혀 주는 진리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근본동기가 ‘인생은 왜 생사의 괴로움이 발생하며 또 어떻게 고통을 없앨 수 있는가’인데 이를 밝혀 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며 실천적인 불타의 근본 가르침이 사성제입니다. 따라서 사성제는 우리 불교가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본사상이요, 우리 불자가 지향해야할 등불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각을 성취하신 후 처음으로 다섯 비구에게 녹야원에서 설하신 초전법륜에서 사성제를 설하시며 “무량한 선법이 있으니 일체의 모든 법은 다 사성제에 포함됩니다. 사성제는 일체 선법을 포함하므로 일체법 중에서 제일입니다.”(중아함경 7)라고 말씀하셨듯이 이 사성제의 참뜻을 파악하는 것은 곧 부처님의 근본입장을 명확히 아는 것입니다.
이 사제를 분석해보면 ‘고집(苦集)의 두 가지는 생사윤회의 고통과 그 원인’을 말하고, ‘멸도(滅道)의 두 가지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안락한 열반과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수행법’을 말합니다.
1. 고성제(苦聖諦)
고성제는 괴로움에 관한 내용을 설명한 진리로 현상계의 사실을 괴로움이라고 인정하고 이를 밝혀 나타낸 것입니다.
괴로움이라는 말은 조화가 깨어진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상계는 조화가 깨어진 곳으로 항상 마음의 불안, 괴로움이 있습니다. 따라서 현상계의 모든 일은 다 ‘괴로움’이 됩니다.
분별성제경<分別聖諦經>에 나타난 고에 대한 설명을 보면,
“어떤 것이 괴로움의 성제인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미운 것과 만나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이 괴로움입니다.”라고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괴로움인 팔고(八苦)에 대하여 설하고 있습니다.
현상계의 실상을 바로 볼 때 현실은 불완전하며 더러움과 고뇌가 가득 찬 미혹의 세계로 현상의 일체가 다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2. 집성제(集聖諦)
집성제는 현상계의 괴로움의 원인을 나타낸 진리입니다.
집(集)은 집기(集起), 원인, 이유라는 뜻으로 ‘사물이 모여 일어나기 위한 원인’이란 의미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은다는 뜻은 아닙니다.
괴로움은 욕망과 집착에서 생기는 것이며 이 욕망과 집착은 무지와 무자각에서 비롯됩니다. 이 무지로 인해서 야기되는 인간의 욕망은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양, 허망된 것을 참인 양 집착하여 괴로움을 낳고 있는데, 이 괴로움의 근본은 인간의 내면적 번뇌인 무명과 애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또한 무명과 애욕의 근원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심(三毒心)이 있는 바, 이 삼독을 떠남으로써 무명과 애욕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모든 집착을 떠나 열반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3. 멸성제(滅聖諦)
멸성제는 인간의 괴로움의 원인인 무명(無明)과 갈애가 다 없어진 고통이 없는 안락한 열반을 나타냅니다. 모든 번뇌를 다 불어 꺼버린 적정(寂靜)의 자리로 모든 고통이 소멸된 이상의 자리인데, 원시경전에서 열반은 모든 탐욕의 다함, 성냄의 다함, 어리석음의 다함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자는 마땅히 끝없는 수행과 노력으로 번뇌의 속박을 벗어 버리고 괴로움을 떠난 멸성제에 도달해야 합니다.
<분별성제경>에서는 “어떠한 것이 사랑이 사라진 것이며 괴로움이 사라진 성제인가? 중생들에게는 실제로 사랑하는 안(內)의 여섯 곳이 있으니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여섯 곳이니라. 그가 만일 해탈하여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끊어 버리고 모두가 욕망을 멸해서 완전히 없애버리면 이것을 이름하여 괴로움이 사라진 것입니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4. 도성제(道聖諦)
도성제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참된 진리이며, 진실한 방편입니다. 무지와 애욕을 모두 멸해 버리고 탐·진·치 삼독이 사라진 고멸의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참다운 방편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방편의 길이 도성제인데 부처님께서는 초전법륜에서 “극단적인 고행도, 절제 없는 방종도 이상실현을 위한 바른 길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이변(二邊)을 떠난 중도(中道)가 바로 열반에 이를 수 있는 길입니다.”라고 설하셨습니다.
이 이변을 떠난 중도가 바로 팔정도입니다.
<분별성제경>에서 “어떠한 것이 괴로움이 사라진 도의 성제인가? 바른 견해(正見), 바른 뜻(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태도(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생각(正念), 바른 선정(正定)입니다.”라고 설하고 있으므로 이 팔정도가 바로 중도며 도성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5. 결론 : 불교 공부의 이유와 목적
<잡아함경>에 보면 사성제와 팔정도를 잘 나타내고 있는 일화가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코삼비의 코시타 동산에 계실 때입니다. 하루는 부처님을 시봉하는 아난다에게 한 외도 수행자가 찾아와 불교를 수행하는 이유와 목적을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집을 나와 부처님 밑에서 수행합니까?”
이에 대해 아난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탐욕(貪)과 성냄(瞋)과 어리석음(痴)을 끊기 위해서입니다.”
“탐진치(貪瞋痴) 삼독에 무슨 허물이 있기에 끊어야 합니까?”
“탐욕에 집착하면 마음이 캄캄해져 자기와 남을 해치게 됩니다. 그러면 현세에서도 죄를 받고 후세에서도 죄를 받습니다. 분노와 어리석음에 집착하는 것도 그와 같이 자기와 남을 해칩니다.
탐진치 삼독에 집착하게 되면 그 순간 사람은 장님이 됩니다. 지혜가 없으면 판단이 흐려집니다.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요, 밝은 것도 아니며, 열반에 이르는 것을 방해할 뿐입니다. 그래서 삼독을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독을 끊으면 어떤 이익과 공덕이 있습니까?”
“삼독을 끊으면 자기도 해치지 않고 남도 해치지 않으며, 현세에도 죄를 짓지 않고 후세에서도 그 과보를 받지 않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기쁘고 즐거우며, 번뇌를 떠나 현세에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삼독을 끊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성스러운 여덟 가지 바른 수행,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하면 됩니다.”
아난다의 자상한 설명을 들은 그는 기쁜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불교를 닦는 이유는 삼독을 끊는 것이고, 닦는 방법은 팔정도의 실천’이라는 아난다의 명확한 답변에서 우리 불자들의 수행 목표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고집의 단계에서 멸도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불자의 수행이어야 합니다.
절에 다니면서 왜 절에 다니는지도 모르는 불자에게 큰 교훈이 되겠습니다.
혜총 / 감로사 주지 실상문학상 이사장
* 위 사성제법문인 불교방송 '희망의 2021 신축년! 혜총스님의 신년특별법문'이 아래 유튜브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