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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경 스님 일화(불교신문 3회게재)
작성자 감로사 작성일 2014-07-15 조회수 2042
보경스님 ①
은사스님 깍듯이 모신 '효상좌'

6.25전쟁 중 부산 감로사 창건

6.25전쟁 중 부산 감로사 창건평생 누더기 한 벌로 '무심수행(無心修行)'하던 서산당(西山堂) 보경(寶瓊, 1915~1989)스님은 대율사(大律師) 자운(慈雲)스님의 맏상좌이며 지관(智冠)스님(조계종 원로의원)의 사형(師兄)이다. 일타스님과는 속가인연이 있으며 집안에서 모두 20여명이 출가했을 만큼 불연(佛緣)이 깊다.


은사인 자운스님과는 불과 다섯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깍듯하게 모셔 '효상좌'로 칭찬이 자자했다. 생일도 자운스님은 음력 3월3일이고 보경스님은 음력 3월5일이다. 보경스님은 출타한 후 돌아와서 은사에게 인사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자운스님이 바깥출입을 마치고 돌아오면 가사와 장삼을 갖추어 입고는 "잘 다녀오셨습니까"라면서 큰절로 인사를 드렸다.

자운스님, 성철(性徹)스님, 향곡(香谷)스님은 각별한 도반으로 평소 돈독한 사이를 유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함께 정진하고 탁마하며 수행의 길을 같이 걸었다. 1956년 자운스님이 감로사에 머물고 있을때 해인사에 주석하고 있던 향곡스님이 찾아왔다. 반갑게 향곡스님을 맞이한 자운스님이 보경스님을 불렀다. "여보게, 향곡스님이 오셨으니 공양대접을 잘 하게" 전쟁 직후여서 절의 살림살이가 어려웠지만, 반가운 도반이 왔으니 공양을 잘 올리라는 뜻이었다. 효상좌로 칭찬을 받고 있던 보경스님은 평소 은사스님의 공양을 정성스럽게 직접 지어올렸다. 은사스님의 당부를 들은 보경스님은 "예"하고 공손하게 대답한 후 공양간으로 돌아가 상을 보아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보경스님이 보아온 공양상에는 보리밥 한 그릇, 간장 한 종지, 그리고 냉수 한 그릇이 전부였다. 평소 온화한 미소가 흐트러지지 않던 자운스님의 얼굴이 조금 상기됐다. 공양상을 내려놓으면서 보경스님이 향곡스님에게 한마디 던졌다 "이 소식을 아는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향곡스님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미소만을 짓고는 보경스님이 보아온 공양을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는 말문을 열었다. "하하. 아주 잘 먹었다." 곁에서 도반 향곡스님과 상좌 보경스님의 법거량(法擧揚)을 지켜 본 자운스님이 미소를 지었다.

한편 보경스님은 후학과 불자들에게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철저히 명심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 마다 강조했다. 보경스님의 육성이다. "지금의 모습을 보면 전생을 알 수 있고,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느냐를 보면 내생의 모습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부지런히 수행하고 정진해야 한다." 상좌 혜총(慧聰, 부산 감로사 주지)스님은 "늘 현실에 충실하고,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고 또 정진하라는 은사스님의 가르침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면서 "출가하여 한평생 수행자로 살아오면서 스님의 이같은 말씀은 커다란 경책이 되었다"고 심경을 밝혔다.

인과응보와 관련된 일화 하나를 혜총스님의 목소리로 들어보자. 때는 1959년 해인사에서 공부하고 있던 혜총스님이 잠시 부산 감로사를 찾았다가 일어난 일이다. "오랫만에 감로사에 왔습니다. 그때 정원스님과 함께 시내구경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은사스님께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를 드리고 절문을 나섰습니다. 영화구경까지 하는 바람에 늦게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절문이 닫혀있었습니다. '스님, 저 돌아왔습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라고 아무리 외쳐도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보경스님께서는 밤새 문을 열어주지 않으셨던 겁니다. 때문에 문앞에서 꼬박 밤을 새우고 말았습니다. 결국 다음날 새벽 예불 시간이 되어서야 은사스님이 문을 열어주셨지요." 보경스님은 문을 열어주면서 혜총스님에게 한마디 했다. "이 소식을 아느냐"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자, 보경스님은 "이게 모두 인과응보이다. 이제 그만 들어오너라." 그제서야 혜총스님은 절문을 들어설 수 있었다.

보경스님이 감로사를 창건한 것은 대중들을 위하는 마음에서였다. 1950년 일어난 6·25 전쟁으로 많은 스님들이 부산으로 피난을 왔지만, 머물 도량이 부족했다. 범어사를 비롯한 기존 사찰의 살림살이로는 전국에서 모인 많은 스님들이 머물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를 느낀 보경스님은 1952년 감로사를 창건하고 대중들을 맞이했는데 당시 많은 대중들이 이 도량에 머물며 전화(戰禍)를 모면할 수 있었다.



보경스님 ②
평생 울력 힘써…도량 곳곳에 손때


선가(禪家)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는 것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평범한 것 같은 이 진리는 수행자들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실천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현실이다.

그러나 보경(寶瓊)스님은 이 같은 가르침을 손수 실천하면서 납자의 길을 걸은 대표적인 어른이다. 때문에 보경스님은 참선수행과 법당에서 예불을 모시거나 염불을 할 때, 그리고 공양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울력(雲力)을 하면서 지냈다. "보수나 노동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도와주는 봉사적 노동협동 방식"이라는 국어사전의 의미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울력은 절집에 있어 고유의 '아름다운 노동방식'이기도 하다.

보경스님의 상좌인 혜총스님(부산 감로사 주지)의 기억이다. "우리 은사스님은 울력을 하는데 '지나칠 만큼' 철저하셨습니다. 한시도 쉬는 틈이 없으셨지요. 앞서 말한 대로 예불이나 공양시간을 제하면 늘 울력을 하셨습니다. 지금 감로사 마당에 있는 연못도 스님이 직접 만드신 겁니다." 그런 까닭에 감로사 도량 곳곳에는 보경스님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남을 느낄 수 있다.

어른스님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시주물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보경스님 또한 예외가 아니다. 틈이 있을 때마다 보경스님은 후학과 대중들에게 시주물의 소중함을 인과응보의 가르침과 곁들여 설명하면서 강조했다. 보경스님의 육성이다. "시주물은 부처님께 공양 올려진 정재(淨財)이다. 따라서 시주물은 어떠한 형태라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시주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지옥(地獄)에 떨어지기도 하고 극락(極樂)에 태어나기도 한다." 물질 만능 풍조가 절집까지 침투한 요즘 귀담아 들어야 할 가르침이다.

그렇다고 보경스님이 시주물을 '쌓아놓고(?)' 지낸 것만은 아니다. 당신 나름대로 시주물을 어떻게 회향(廻向)하는지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혜총스님의 이야기이다. "사실 오랫동안 은사스님이 감로사 주지소임을 보았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에서 소임을 넘겨주실 때 스님께 조심스럽게 경제적인 부분을 여쭈어 보았습니다." 당시 보경스님은 혜총스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허허. 이 정도로 도량불사를 해 놓았으면 (경제적으로) 모아 놓은 것 아닌가. 감로사는 세 사람이 살면 세 사람 살 정도의 정재가 들어오고, 다섯 사람이 살면 다섯 사람 살 만큼의 정재가 들어오니 정재를 쌓아놓지 말게. 내가 다른 것은 (지닌 것이) 없다. 네가 살아보면 알 것이다."

그러면서 보경스님은 절집에 들어온 '정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말했다. "부처님을 모신 도량인 절은 돈을 모아 놓으면 안 된다. 정재는 부처님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는데 써야 한다" 정재는 축재(蓄財)의 대상이 아니라, 불사(佛事)와 중생구제(衆生救濟)를 위한 용도로만 사용해야 한다는 스님의 뜻은 지금 우리시대의 사부대중에게 주는 경책이다. 나중에 알려진 일인데, 보경스님은 다른 대중들 몰래 어려운 이웃들을 많이 도왔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끼니 걱정을 하는 절 아래 마을의 사람들이나, 학비가 없어 공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에게 정재를 회향했던 것이다. 전혀 상(相)을 내지 않고 남몰래 보시행을 펼쳤기 때문에 보경스님의 이 같은 모습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편 스님은 평생 참선수행으로 일관한 납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언제나 화두를 놓지 않고 정진하던 스님은 만년(晩年)에는 염불수행을 병행했다. 부산 감로사에서 스님을 시봉했던 혜총스님의 기억이다. "노장께서는 마지막까지 염불수행을 하셨습니다. 틈이 있을 때마다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스님의 모습을 떠올리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경스님은 하루에 여섯 번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육시예불(六時禮佛)' 또한 소홀히 여기지 않았을 만큼 수행에 있어 철저했다. 키가 170cm에 이르고 아주 다부진 몸을 지녔기에 힘 또한 장사였던 보경스님의 성품은 잘못된 것은 두고 못 보았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보경스님 ③

"내가 이 세상과 인연을 다하고 떠날 때는 애를 먹이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 말아라."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병원에 3일간 입원했던 보경(寶瓊)스님이 부산대 병원을 퇴원한 후 감로사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상좌 혜총(慧聰)스님의 손을 꼭 잡고 한 말이다. 늘 강건(剛健)함을 유지했을 만큼 건강에 소홀하지 않던 보경스님은 병원 가는 것을 마다했다고 한다. 노환으로 인해 병이 찾아온 뒤에야 상좌와 신도들의 간청에 겨우 병원을 찾았을 뿐이다. 이때가 입적하기 3개월 전이다. 당시 은사스님의 말을 떠올린 혜총스님의 눈가에 이슬이 머물렀다.

감로사로 돌아온 뒤에도 보경스님은 일상생활을 그대로 유지했다. 예불하고, 공양하고, 울력하고, 염불하고, 좌선삼매에 빠지는 모습에 변함이 없었다. 부산대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상좌와 했던 약속을 보경스님은 빈틈없이 지켰다. 1989년 12월 18일 점심공양을 예전처럼 마친 보경스님은 당신의 처소로 돌아가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아무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사리에 집착하지 말라" 당부

점심공양 후 조용히 '입적'


혜총스님의 기억이다. "저도 점심공양을 마치고 은사스님 방에 들어갔습니다. 가만히 누워계시더라구요. 저는 스님이 낮잠을 주무시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기척이 없으시기에 살펴보니 열반에 드신 것이었습니다. 불과 1시간 전만해도 공양을 마치고 도량을 포행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은사스님은 주무시듯이 입적하신 겁니다." 혜총스님이 보경스님의 원적을 확인한 것은 이날 오후 2시쯤이다. "예로부터 '조사열반(祖師涅槃)'이란 말이 있는데, 은사스님의 가시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때 보경스님의 세수는 75세이고, 법납은 48세였다.

스님의 영결식은 12월20일 오전 10시 감로사에서 사부대중 700여명이 동참한 가운데 봉행됐다. 성공스님의 집전으로 봉행된 이날 영결식에는 정련스님(전 총무원 총무부장), 흥교스님(범어사 강주), 일각스님(송광사 방장), 선래스님(금정학원 이사장), 진상호 감로사 신도회장 등이 행장소개와 영결사, 조사, 추도사 등을 낭독했다. 영결식을 마친 보경스님의 법구는 범어사로 옮겨져 같은 날 오후 1시에 다비식을 거행했다.

다비식을 봉행한 후 스님의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는데, 이는 보경스님의 뜻을 따른 것이다. 보경스님은 생전에 "육체(肉體)가 있는 그대로 사리인데, 달리 사리를 구할게 무엇인가.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사리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사리를 취하는 것은 착(着)이다"라고 사리를 숭배하는 것을 경계했다. 자운스님 문도는 본래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것이 '문중전통'이다.

보경스님의 은사인 자운스님 역시 "부처님 사리는 인천(人天)의 복전(福田)이 되기에 그 사리가 위대하지만, 스님의 사리에 대해서는 대단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후학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자운스님은 맏상좌인 보경스님을 무척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 보경스님이 당신보다 먼저 입적했을 때 손수 49재를 해 주었다. 그렇다고 생사일여(生死一如)를 증득한 스님이 죽고 삶의 문제에 집착을 하지는 않았다.

혜총스님의 기억이다. "보경스님이 열반했을 때 제가 자운스님에게 '스님 어떠신지요'라고 심경을 여쭈어 봤습니다. 그런데 자운스님은 '이 세상 사람이 명(命)을 두고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살았으니 본인(보경스님)도 나도 후회는 없다. 조금 먼저 가고 늦게 가고 할 뿐이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1915년 공주에서 태어난 보경스님은 1942년 합천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은사로 불문(佛門)에 들었다. 스님은 금강산 유점사, 지리산 상무주, 합천 해인사 등에서 수행 정진했다. 1952년에는 부산시 진구 전포동에 감로사를 창건해 염불원을 여는 등 불법홍포에 전력을 기울였다. 상좌로는 법희(法喜)스님과 혜총스님이 있다.

부산=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2003-04-04 오전 9:45:59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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